일기는 일기장에

[일기] 도어락과 외할머니의 강박증

manwon 2020. 10. 6.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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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5일 월요일 - 청명한 가을 날씨

외할머니로 인해 결국 보조키를 새로 달았다. 위 사진에서 위에 있는 게 오늘 5만 원 주고 추가 부착한 보조키다. 정확한 명칭은 보조 도어락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이 글에서는 그냥 편하게 보조키라고 적는다. 

며칠 전에 밀레 도어락을 설치했다고 본 블로그에 을 하나 남겼다. 사진에서 길쭉하게 생긴 게 그거다. 사실 그 도어락만 있어도 보안은 충분한데 오늘 추가로 보조키를 설치한 건 바로 외할머니의 강박증 때문이었다. 한 15년 전부터 그러셨나? 집 안의 모든 창과 문을 확실하게 잠그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디는 강박증이 외할머니에게 생겨버렸다. 외할머니를 모시고 산 지 30년이 넘었는데 원래부터 그러진 않으셨거든. 아마도 2003년도 유영철 사건을 뉴스로 접하고 생긴 강박증이 아닐까 싶다. 강박증이 생긴 시기와 그 사건 발생 연도도 대충 맞는 것 같고. 2003년도에 외할머니의 연세가 딱 80세였으니, 뇌의 노화와 유영철 사건의 정신적 충격이 결합되어 생긴 강박증이 아닐까 싶다.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푹푹 찌는 한여름의 열대야에도 에어컨도 없는 집안의 모든 창문을 닫고 살아야 하는 고난이 시작됐다. 더위를 잘 참는 나로서도 전기밥솥과 냉장고 등의 각종 전기제품 등이 내뿜는 열기가 고스란히 쌓이는 밀폐 공간에서 열 몇 번의 여름을 보내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외할머니가 주무실 때 잠깐잠깐 몰래 작은 창문을 열곤 했는데, 워낙 밤에 소변보러 자주 깨시는 분이라 그때마다 내가 열어 놓은 작은 창문을 닫고 잠그는 걸 시작으로 나머지 집안의 모든 창문과 문까지 제대로 잠겼는지 재차 확인하시는 외할머니를 보며 나는 그냥 창문 여는 걸 포기하게 됐다. 다행히 몇 년 전에 에어컨은 구매했다. 하지만 외할머니의 강박증은 그대로. 이제 연세도 97세나 되셔서 일상생활의 단순한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실 때가 대부분이다.  

지난 금요일 외할머니가 나를 부르시더니 "얘야 현관문이 자꾸 열린다." 하셨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며 머릿속에서 '아차!'라는 소리가 울렸다. 

'아 외할머니가 자동 도어락을 결국 이해 못 하시는구나!!!'

자동 도어락을 설치한 날, 자동으로 잠기는 거고 안에서 열면 열려도 밖에서는 안 열린다고 잘 말씀드렸기에 대충 알아들으셨겠지 했지만 결국 이해를 못 하신 거였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설명을 더 드려도 이 문제는 외할머니가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을 벗어난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바로 포기할 수는 없지.... 귀가 거의 안 들리시는 외할머니를 붙잡고 스케치북에 굵은 색연필로 크게 글씨를 쓰며 설명을 시작했다. 

"할머니, 이거 안에서 열려도 밖에서는 안 열려요"
"문을 닫으면 사람이 잠글 필요 없이 자동으로 잠기는 거예요"
"이게 안에서는 열려도 제대로 안전하게 잠겨 있는 상태인 거에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외할머니는 이해를 못 하셨다. 현관문 밖으로 모시고 나가서 문이 닫힐 때 밖에서 열리지 않는다는 걸 몇 번을 보여드려도 이해를 못 하셨다. 그냥 안에서 손잡이를 잡으면 문이 열리니까 이건 잠긴 게 아니다, 밖에서도 도둑이든 강도든 문을 열 수 있다고 딱 그것만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즉 외할머니는 당신이 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돌려도 문이 열리지 않는 상태만이 오롯이 문이 안전하게 잠긴 상태로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30분 넘게 설명해도 진척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할머니, 저거 안전한 거에요. 할머니 손주가 단 건데, 할머니는 손주도 못 믿어요?" 했는데 그때 나온 대답에 내 머릿속에 작은 수류탄이 터진 듯 했다. 

"문이 열리는데 뭘 믿니?"

결국 오늘 보조키를 추가로 설치했다. 6만 원 달라는 거 만 원 깎았다. 원래 물건값 깎자는 소리도 어렸을 때는 종종 했는데, 나이 좀 먹고 일절 깎자는 소리를 안 했다. 그런데 오늘은 좀 깎았다. 

설치가 끝나고 외할머니는 이제야 안에서도 열리지 않는 현관문을 확인하곤 무표정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그래도 안도의 미소라도 흘려주실 줄 알았는데, 내가 외할머니의 연세를 너무 얕잡아 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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